사진=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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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포인트=김정훈 기자] 13일 0시를 기해 정부가 '석유 최고가격제'를 전격 시행했다. 1997년 유가 자유화 이후 29년 만에 정부가 석유 시장 가격에 직접 개입하는 것으로, 미국·이란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고 국내 휘발유·경유 가격이 2,000원 선을 위협하자 꺼내든 카드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민생물가 특별관리 관계장관 TF 4차회의'에서 "위기 상황을 틈탄 도를 넘는 가격 인상에 단호히 대응하고 소비자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1차 최고가격은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도매가 기준으로 보통휘발유 ℓ당 1,724원, 자동차용 경유 1,713원, 실내 등유 1,320원이다. 3월 11일 기준 정유 4사 평균 공급가(휘발유 1,833원·경유 1,930원)보다 휘발유 109원, 경유 218원, 등유 408원 낮은 수준이다.

시행 첫날 효과는 일부 확인됐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에 따르면 13일 오전 10시 30분 기준 전국 주유소 평균 휘발유 가격은 ℓ당 1,883.79원으로 전날보다 14.99원 내렸고 경유는 1,897.89원으로 21.08원 하락했다. 서울 지역도 휘발유 1,906.40원(20.66원↓), 경유 1,905.53원(30.64원↓)으로 하락세를 보였다.

다만 현장 체감 온도는 아직 미지근하다. YTN이 서울 인근 주유소 12곳을 확인한 결과 3곳은 전날과 가격이 동일했는데, 기존에 비싼 값으로 들여온 비축 물량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경기 고양시의 한 주유소 관계자는 "비축 물량이 소비되지 않아 가격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높은 가격으로 계속 팔면 손님이 줄 것 같아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내려야 할지 고심 중"이라고 전했다.

상한선 산정 방식도 눈길을 끈다. 정부는 전쟁 발발 전인 2월 마지막 주 정유사 세전 공급가를 기준가격으로 잡고, 싱가포르 국제 석유제품 가격(MOPS)의 2주간 등락률 평균을 변동률로 곱한 뒤 세금을 더해 상한선을 도출했다. 국제유가 급등 충격이 국내 가격에 즉시 전이되지 않도록 2주 단위의 평균으로 완충하겠다는 취지다. 최고가격은 매 2주마다 재설정되며 1차 적용 기간은 3월 13일부터 26일까지다.

공급 위축을 막기 위한 장치도 함께 가동됐다. 재정경제부는 13일부터 5월 12일까지 두 달간 '석유제품 매점매석 행위 금지 고시'를 시행한다. 정유사의 월간 반출량은 전년 같은 기간의 90% 이상을 유지해야 하고, 주유소가 정당한 이유 없이 판매를 거부하면 시정 명령과 형사 처벌이 가능하다.

정유사 손실에 대해서는 회계·법률 전문가로 구성된 '최고액 정산위원회'가 분기별로 보전하는 사후 정산 체계를 마련했다. 대한석유협회는 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 4사가 최고가격을 즉각 준수해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오전 SNS를 통해 "불안정한 국제 정세로 요동치는 국내 기름값을 잡기 위해 공급가격에 분명한 상한선을 두기로 했다"며 "이를 어기는 주유소 등을 발견하면 지체 없이 신고해달라"고 국민 감시를 당부했다.

정치권 반응은 갈린다. 여당인 민주당은 중동 사태를 빌미로 한 폭리 대응에 필수적인 수단이라며 정유사 횡재세 도입까지 거론한 반면, 야당인 국민의힘은 "가장 손쉽고 게으른 방법"이라고 비판했다. 안철수 의원은 "불공정한 처방"이라며 유류세 환급·비축유 방출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전문가들도 엇갈린다. 고려대 강성진 교수는 "현재 가격 상승에는 심리적 요인이 크다. 정부의 개입 선언 자체가 시장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평가한 반면, 서울시립대 송헌재 교수는 "단기적 효과는 있겠지만 최고가격제는 부작용이 매우 큰 정책"이라며 "공급 축소가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변수는 중동 정세다. 브렌트유 선물 가격이 장중 다시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고, 이란 합동사령부는 "전쟁이 확산하면 유가 배럴당 200달러"를 경고한 상태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2주 단위로 재설정되는 상한선이 계속 올라가면서 소비자 체감 효과가 희석될 수 있다.

정부는 유류세 추가 인하라는 차기 카드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국제유가가 감내하기 힘들 정도로 오르면 꺼내겠다"(강기룡 재경부 차관보)는 조건을 달았다.

29년 만에 되살린 가격 통제가 전쟁발 유가 폭풍 속에서 방패가 될지, 일시적 진통제에 그칠지는 중동의 포성이 멈추는 속도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