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I 생성 이미지
사진=AI 생성 이미지

[다이어리포인트=김정훈 기자] 원·달러 환율이 31일 1530원을 돌파하며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선 가운데,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규모 국내 주식 매도가 겹치며 원화 가치가 급격히 하락한 결과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대비 14.4원 오른 1530.1원에 주간거래를 마감했다. 장 초반 1519.9원으로 출발한 환율은 상승세를 이어가며 장중 한때 1536.9원까지 치솟았다. 주간 거래 기준으로 환율이 1530원을 상회한 것은 2009년 3월 10일 이후 처음이다.

주목할 점은 이번 원화 약세가 단순한 달러 강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이날 100.4 수준으로 오히려 전날보다 소폭 하락했다. 달러 자체는 약해졌는데도 원·달러 환율만 가파르게 오르는 이례적인 흐름이 나타난 셈이다.

실제로 미국·이란 전쟁 발발 이후 달러인덱스 상승폭은 2%대에 그쳤지만, 같은 기간 원화 가치는 5% 이상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통화 대비 원화만 유독 가파른 약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달러 요인뿐 아니라 국내 고유의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원화 약세를 부추기는 가장 큰 요인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규모 이탈이다. 이날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3조8330억원을 순매도했다. 한국거래소 기준 역대 네 번째로 큰 규모다. 9거래일 연속 조 단위 순매도 행진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달 들어서만 외국인의 코스피 누적 순매도 규모는 약 35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수준이다.

외국인 매도가 집중되면서 국내 증시도 큰 폭으로 하락했다.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4.26% 떨어진 5052.46에 장을 마쳤다. 지난 2월 27일 장중 6347.41까지 올랐던 코스피가 한 달 남짓 만에 5000선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전환된 것이다. 코스닥 지수도 4.94% 급락한 1052.39에 거래를 마감했다.

개인 투자자와 기관은 각각 약 2조8000억원, 1조원 규모를 순매수하며 방어에 나섰지만 외국인 매도 물량을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대형주가 4~6%대 급락하며 지수 하락을 주도했고, 의료·정밀기기, 전기·전자, 건설, 운송장비 등 대부분 업종이 동반 약세를 보였다.

환율 급등과 증시 급락의 근본적 배경에는 중동 전쟁의 장기화가 자리하고 있다. 올해 2월 말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시작된 무력 충돌은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공급 차질 우려를 키우고 있다. 국제유가는 브렌트유 기준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한 바 있으며,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는 성장률 하향 압력으로 직결되는 요인이다.

고유가가 장기화될 경우 수입 물가 상승을 통해 국내 소비자물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OECD는 최근 한국의 2026년 성장률 전망을 하향 조정하면서 중동 사태를 직격탄으로 지목했다. 미국의 2026년 물가 상승률도 기존 2.6%에서 4.2%로 대폭 상향 전망되면서 글로벌 인플레이션 재점화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의 첫 공개 발언도 시장의 이목을 끌었다. 이날 오전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첫 출근한 신 후보자는 기자들의 질문에 "현재 환율은 높지만 달러 유동성은 상당히 양호하다"며 "환율 레벨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다만 시장 일각에서는 환율이 금융위기급으로 치솟는 상황에서 차기 중앙은행 수장 후보자의 원론적 답변이 오히려 불안 심리를 자극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실제로 해당 발언 이후 환율 상승폭이 더욱 확대되는 흐름이 관측됐다.

향후 환율 방향은 중동 정세와 유가 흐름에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미국과 이란 간 외교적 해법이 가시화되지 않을 경우 환율이 1550원까지 추가 상승할 수 있다는 시장 전망도 나오고 있다. 외국인 매도세가 진정되지 않는 한 환율 상승과 증시 하락의 악순환이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시장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한편 정부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구두 개입 수위를 높이고 있으나, 실효성 있는 대책이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유가 상승에 따른 민생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추가경정예산에 10조1000억원 규모의 고유가 대응 패키지를 편성한 가운데, 외환시장 안정 대책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