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어리포인트=엄주용 기자] "저는 전업자녀로 일하고 있습니다." 농담처럼 시작된 이 한마디가 이제는 통계적 현실이 됐다. 취업 대신 부모 집에 남아 가사를 전담하고 그 대가로 생활비를 받는 '전업자녀'가 한국 사회의 새로운 키워드로 급부상하고 있다.
전업자녀란 독립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거주하면서 청소·식사 준비·심부름·부모 돌봄 등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는 성인 자녀를 뜻한다. 단순히 부모에게 기대는 '캥거루족'과는 결이 다르다. 집안일이라는 노동을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일부 사례에서는 집안일 범위와 급여까지 문서로 합의하는 사실상의 '가족 내 근로계약'에 가까운 형태로 운영된다.
이 현상은 2023년 중국에서 먼저 등장했다. 당시 중국 15~24세 청년 실업률은 21.3%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취업이 막힌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와 생계를 재편한 것이 시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부모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매달 한화 70~100만 원 수준의 급여를 받는 사례도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올해 초부터 SNS에 '전업자녀', '전업자녀 브이로그' 해시태그가 붙은 영상이 잇따르면서 본격적으로 화제가 됐다. 영상 속 청년들은 아침 기상 후 청소, 부모 심부름, 식사 준비로 이어지는 일과를 공유하며 "출퇴근은 없지만 책임은 있다"고 말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력서 작성, 자격증 공부, 면접 준비를 병행하며 전업자녀 생활이 영구적 선택이 아닌 '대기 상태'임을 밝힌다.
규모도 예상보다 크다. 사회경제학자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저서 『전업자녀』에서 현재 한국의 전업자녀 수를 부모와 동거하는 2040세대를 기준으로 최대 800만 명으로 추산했다. 청년층 비경제활동인구가 70만 명을 넘어선 통계와 맞물려, 이 현상이 단순한 유행이 아닌 구조적 변화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전업자녀 현상의 배경에는 복합적 요인이 얽혀 있다. 기업의 수시·경력직 채용 확산으로 신입 채용 통로가 줄어들면서, 노동시장에 처음 진입하려는 청년들이 반복적으로 탈락하는 구조가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치솟는 월세와 생활비, 1인 가구 유지 비용까지 더해지면서 외부 노동보다 가족 내 역할 분담이 오히려 합리적 선택으로 여겨지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 교수는 이를 두고 "인구가 힘이 아니라 가족이 짐인 시대가 펼쳐지면서 4인 표준 가족이 붕괴됐고, 청년들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전업자녀를 택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전업자녀를 가계의 짐이 아닌 사회의 힘으로 전환하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의 본질이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임을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전업자녀 현상은 청년들이 일을 회피한 결과가 아니라 첫 일자리 통로가 막힌 구조의 반영"이라며 "신입을 경력으로 키울 수 있는 노동시장 출발선 복원이 근본 해법"이라고 제안했다. 단기적으로는 부모와의 공생을 통해 안정감을 찾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노동시장 복귀 기회를 잃고 고용 불가능한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제기된다.
산업화 이후 꾸준히 핵가족 분화로 이어져 온 한국 가족 구조가 다시 본가로 회귀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청년 취업난과 고물가, 주거비 급등이 교차하는 구조적 환경 속에서 전업자녀라는 선택이 개인의 나약함이 아닌 시대의 산물로 재해석되는 지금, 청년 고용 정책과 사회 안전망에 대한 근본적 논의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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